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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공부
한시 해설 · 4장 · 2026-10-21 갱신

한시의 역사

선진 시경·초사에서 한위 오언시, 당송 근체시, 명청 시론에 이르기까지 중국 한시의 시대별 흐름과 과거 제도·비평의 변천을 살핀다.

선진의 시와 초사: 북방의 경전과 남방의 서정

『시경』의 풍·아·송 편제와 경학적 해석

중국 고전 시가의 역사는 선진(先秦, 진나라 통일 이전) 시대의 두 거대한 원류인 『시경(詩經)』과 『초사(楚辭)』에서 문을 연다 [S02, S46, S47]. 주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문화권에서 전승된 『시경』은 통용본 기준 305편을 수록한 가장 이른 시가 집성이다 [S02, S46]. 개별 작품의 창작 연대는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시대 중엽까지 수백 년에 걸쳐 있으며, 대부분의 편은 지은이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S02, S46].

『시경』의 편제는 음악적 성격과 쓰임새에 따라 풍(風)·아(雅)·송(頌) 세 부분으로 나뉜다 [S02, S46]. ‘풍(국풍·國風)’은 열다섯 지역의 가요 160편을 모은 것이고, ‘아(대아·大雅와 소아·小雅)’는 주나라 왕실과 귀족 사회의 연회·정치·역사 가요 105편을 담은 것이며, ‘송(주송·노송·상송)’은 종묘 제사에서 선왕의 공덕을 기리며 춤과 함께 올리던 찬가 40편이다 [S02, S46]. 따라서 『시경』의 수록작을 모두 민간의 소박한 민요나 익명 가요로만 환원해서는 안 되며, 민간의 노래와 궁정·귀족의 의례악이 함께 묶인 복합적 문헌으로 읽어야 한다 [S46]. 「주남(周南)」의 첫 편인 「관저(關雎)」는 네 글자 구절(사언·四言)의 안정된 박자와 구절의 반복을 통해 물가의 새에서 군자와 숙녀의 배필로 시상을 이끌어 내는 『시경』의 대표작이다 [S46].

關關雎鳩,在河之洲。窈窕淑女,君子好逑。 — 『詩經』 「周南·關雎」 [S46]

“관관 화답하며 우는 물수리는 황하의 모래톱에 있네. 그윽하고 고운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S46] 원래 노래로 불리던 이 시편들은 춘추시대 외교 석상에서 의중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인용구(부시언지·賦詩言志)로 쓰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교의 핵심 경전으로 자리 잡았다 [S103]. 한대 경학(經學) 전통에서 나온 「모시서(毛詩序)」는 시를 마음속 뜻의 발현으로 정의하면서 개인의 감정과 공동체의 정치·교화를 하나로 연결했다 [S103].

詩者,志之所之也。在心為志,發言為詩。 — 「毛詩序」 [S103]

『초사』와 굴원 전통의 서정

북방의 『시경』이 네 글자 중심의 절제된 형식과 집단적·의례적 정서를 보여 준다면, 전국시대 후반 남방 초(楚)나라 지역에서 형성된 『초사(楚辭)』는 유장한 장단구 호흡과 신화적 상상력, 그리고 시인 개인의 치열한 내면 고백을 전면에 내세웠다 [S47, S54].

『초사』의 중심에는 전국시대 초나라 귀족 출신 시인으로 전하는 굴원(屈原)과 그의 문학적 계승자인 송옥(宋玉) 등이 있다 [S47, S54, S55]. 굴원의 대표작으로 전하는 장편 서정시 「이소(離騷)」는 구절마다 어조사 ‘혜(兮)’를 배치하여 네 글자 정형을 깨뜨리고, 향기로운 풀(향초·香草)과 미인(美人)의 비유를 빌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과 민생을 향한 비애를 읊었다 [S47, S54].

長太息以掩涕兮,哀民生之多艱。 — 「離騷」 [S47]

“길게 한숨 내쉬며 눈물을 닦노라니, 백성의 삶이 이토록 고달픈 것이 슬프구나.” [S47] 또한 초나라 민간의 무속 제사 악가를 문학적으로 다듬은 연작인 「구가(九歌)」와, 송옥에게 귀속되어 가을 기운의 스산함과 실직한 선비의 비애를 읊은 「구변(九辯)」은 후대 한시에서 가을의 비애(비추·悲秋)와 유배·실의의 정서를 형상화하는 중요한 전범이 되었다 [S47, S54, S55]. 다만 현전하는 『초사』 단행본은 한대 유향(劉向) 등이 굴원·송옥의 작품과 한대 문인들의 모방작을 함께 엮은 선집이므로, 『초사』 전체를 굴원 한 사람의 직접 창작으로 고정하지 않고 편별 전승과 편집 과정을 고려해 읽어야 한다 [S47, S54].


한·위의 악부와 오언시의 성립

한대 악부 관서의 채집과 문인 악부

진(秦)·한(漢) 통일 제국 시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시가사에는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국가 기관에 의한 민간 가요의 채집이고, 다른 하나는 다섯 글자 한 구로 이루어진 오언시(五言詩)와 초기 칠언시(七言詩)의 성립이다 [S06, S07, S10].

후한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는 한 무제(孝武帝) 때 음악 관청인 악부(樂府)를 설치하여 각 지역의 노래를 수집한 사실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S10].

自孝武立樂府而采歌謠,於是有代趙之謳,秦楚之風,皆感於哀樂,緣事而發。 — 『漢書』 卷三十 「藝文志」 [S10]

관서에서 채집하여 악보와 함께 보관한 노래들은 전쟁터 병사의 고초, 고향을 떠난 나그네의 시름, 가난한 아낙의 삶 등 구체적인 사건에 촉발되어(緣事而發) 태어난 서사적·서정적 가요들이었다 [S07, S10]. 여기서 한대 악부 관서가 실제로 채집·연주한 가요와, 후대 문인들이 그 악부의 제목이나 체제를 빌려 지은 ‘악부체 시(문인 악부)’는 서로 다른 역사적 층위임을 구별해야 한다 [S07, S10].

『고시십구수』와 건안 시단의 풍골

한대 중·후기를 거치며 민간의 오언 가요를 흡수한 문인들은 다섯 글자 구절이 주는 서정적 밀도에 주목했다 [S06, S13]. 남조 양나라의 시문 선집 『소명문선(昭明文選)』 권29에 ‘고시(古詩)’라는 제목 아래 열아홉 편이 묶여 전하는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는 이 시기 무명 문인들이 남긴 오언고시의 결정판이다 [S13, S19]. 개별 작품의 정확한 지은이와 연대는 확정되지 않았으나, 인생의 유한함과 타향살이의 고독, 이별한 임을 향한 그리움을 평이하면서도 깊은 오언 구절에 담아내어 후대 오언시의 모범으로 추앙받았다 [S13, S19].

이 오언고시와 악부 전통이 실존하는 작가들의 뚜렷한 개성과 만난 시기가 후한 말·위(魏) 초의 건안(建安, 196–220) 시단이다 [S12, S56, S57, S58]. 정권을 장악한 조조(曹操)와 그의 두 아들 조비(曹丕)·조식(曹植)을 일컫는 ‘삼조(三曹)’, 그리고 그 주변에 모인 건안칠자(建安七子)는 전란으로 무너진 시대의 비장함과 지식인의 포부를 강건한 어조로 노래했다 [S12, S56, S57, S58].

  • 조조(曹操, 155–220): 옛 악부 제목을 빌려 당대의 현실과 영웅적 회포를 읊은 시인으로, 사언 악부인 「단가행(短歌行)」(“對酒當歌,人生幾何”)과 행군의 고초를 그린 「고한행(苦寒行)」 등을 남겼다 [S56].
  • 조비(曹丕, 187–226): 위나라 문제(文帝)에 오른 인물로, 칠언 구절이 매 구 압운하며 유려하게 이어지는 「연가행(燕歌行)」 기일(其一)을 남겨 칠언시 형성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S06, S57, S120].
  • 조식(曹植, 192–232): 풍부한 수사와 격정적인 기상으로 오언시의 예술성을 끌어올렸으며, 「백마편(白馬篇)」·「공연시(公讌詩)」·「낙신부(洛神賦)」 등을 남겼다 [S12, S58].

후대 비평가들은 한·위 시대의 이 강건하고 진솔한 시풍을 ‘건안풍골(建安風骨)’이라 불렀다 [S12, S13, S14]. 훗날 금(金)나라 시인 원호문(元好問)이 「논시삼십수(論詩三十首)」 제1수에서 한·위의 시를 정체(正體, 바른 본체)의 기준으로 삼아 평한 구절은 이 시대가 중국 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S123].

漢謠魏什久紛紜,正體無人與細論。 — 元好問, 「論詩三十首」 其一 [S123]

“한나라의 가요와 위나라의 시편들을 두고 오랫동안 말이 분분했으나, 시의 바른 본체를 누구와 더불어 세밀히 논하리오.” [S123]


위진남북조의 시 세계와 영명체의 성률 탐색

전원·산수·악부의 분화: 도연명·사령운·포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는 정치적 분열과 전란이 이어진 시대였으나, 문학사에서는 시의 제재가 자연(전원과 산수)으로 확장되고 언어의 조탁과 음율 의식이 정교해진 시기다 [S06, S12, S13]. 이 시기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세 인물로 동진의 도연명, 남조 송(宋)의 사령운과 포조를 들 수 있다 [S59, S60, S62].

도연명(陶淵明, 약 365/372–427)은 당시 시단에 유행하던 현학(玄學)적이고 난해한 시풍에서 벗어나, 농촌의 일상과 자연 속의 평온을 꾸밈없는 평담(平淡)한 언어로 그려 내어 전원시(田園詩)의 문을 열었다 [S59, S121]. 그의 대표작 「귀원전거 기일(歸園田居 其一)」과 「음주(飲酒)」 기오(其五)는 속세의 그물을 벗어나 전원으로 돌아온 삶의 성찰을 담백한 오언고시로 보여 준다 [S59, S121].

반면 사령운(謝靈運, 385–433)은 산과 계곡, 폭포와 숲의 경관을 정밀한 대우(對偶)와 치밀한 수사로 묘사하여 남조 산수시(山水詩) 전통을 확립했다 [S12, S60]. 또한 한미한 가문 출신인 포조(鮑照, 약 414–466)는 「의행로난(擬行路難)」 열여덟 수와 「매화락(梅花落)」 같은 악부시를 통해 칠언 구절과 장단구가 교차하는奔放(분방)한 리듬을 실험하며 당대 칠언고시의 길을 닦았다 [S06, S62].

시론의 성립과 영명체 성조 의식

창작의 축적과 함께 남조에서는 시의 역사와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문 비평서가 탄생했다 [S12, S13].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이 그것이다 [S12, S13]. 특히 종영은 『시품』에서 한·위부터 남조 양나라에 이르는 오언시 시인 120여 명을 상·중·하 세 품급으로 나누어 비평하면서, 건안·태강(太康)·원가(元嘉) 등 시대별 시단의 변천과 작가의 계보를 추적했다 [S12].

氣之動物,物之感人,故搖盪性情,行諸舞詠。 — 鍾嶸, 『詩品』 序 [S12]

이와 동시에 남조 제(齊)나라 영명(永明, 483–493) 연간에는 심약(沈約, 441–513)·주옹(周顒)·사조(謝朓) 등이 한자의 네 성조(평·상·거·입)를 시의 구절 배열에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영명체(永明體) 운동을 펼쳤다 [S08, S11, S61]. 심약은 『송서』 「사령운전론」에서 앞뒤 소리의 높낮이와 경중을 교차시켜야 한다는 원리를 천명했다 [S11].

若前有浮聲,則後須切響。 — 沈約, 『宋書』 「謝靈運傳論」 [S11]

다만 앞서 형식과 호흡과 운과 평측에서 살폈듯, 사성 의식이나 영명체의 출현을 심약 한 사람의 단독 발명으로 돌리거나, 영명체가 이미 당대 율시의 모든 규칙을 갖춘 완성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S08, S11]. 육조의 대우 기법과 성조 실험은 당대 근체시가 태어나기 위한 필수적인 토양이었지만, 그것이 한 편의 엄정한 정형으로 굳어지기까지는 수·당 초의 시간을 더 거쳐야 했다 [S06, S08].


당과 송: 근체시의 만개와 시·사의 공존

당대(唐代, 618–907)의 시단과 과거 제도의 시부

당나라는 고체시와 악부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동시에 오언·칠언의 절구와 율시라는 근체시(近體詩) 규범이 완성되어 찬란한 정점을 이룬 시대다 [S04, S06, S07]. 당대에 시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발전한 배경에는 문학적 성숙뿐 아니라 제도적·사회적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S07, S48].

가장 중요한 제도적 기반은 과거제(科擧制), 그중에서도 진사과(進士科) 시험이었다 [S48]. 당대 진사과 시험은 경문 일부를 가리고 채우게 하는 첩경(帖經), 정치·실무 논술인 책문(策問), 그리고 문학적 창작력을 겨루는 잡문(雜文)의 세 마당(삼장·三場) 제도를 형성했는데, 중당 이후 잡문 시험에서 시(詩, 주로 오언 배율 형태의 성시·省試)와 부(賦)의 비중이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S48]. 관료로 입신하려는 전국의 지식인들에게 평측과 압운, 대우를 정확히 구사하는 능력은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수나라 육법언의 『절운(切韻)』을 계승한 운서가 널리 보급되었다 [S16, S48]. 당 현종 때 손면(孫愐)이 쓴 「당운서(唐韻序)」는 당시 운서의 성행을 직접 증언한다 [S16].

惟陸生《切韻》,盛行於世。 — 孫愐, 「唐韻序」 [S16]

여기에 궁정 연회에서의 응제시(應製詩) 창작, 문인들 사이의 수창(酬唱, 시를 주고받으며 화답함)과 행권(行卷, 과거 응시 전에 명사들에게 자신의 시문을 적어 보내 이름을 알림) 풍습, 악공과 기녀들이 당대 시인의 절구를 노래로 부르던 음악 문화가 어우러져 당시(唐詩)의 황금기를 일구었다 [S07, S48].

문학사에서는 약 300년에 걸친 당대 시단을 흔히 초당(初唐)·성당(盛唐)·중당(中唐)·만당(晩唐)의 네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S06, S14]. 이 구분은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 편리한 지도이지만, 왕조의 정치사 연대와 문학사적 경계가 칼로 자르듯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각 시기 안에서도 여러 시풍이 공존했다 [S06, S14].

  1. 초당(7세기~8세기 초): 남조의 화려한 궁정 시풍을 벗어나 시의 기골을 회복하려 한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鄰)·낙빈왕(駱賓王)의 ‘초당사걸(初唐四傑)’과 진자앙(陳子昂)이 활약했고, 심전기(沈佺期)·송지문(宋之問) 등에 이르러 오언율시의 점대·평측 규범이 정착했다 [S04, S06].
  2. 성당(8세기 전반~중엽, 현종 개원·천보 연간 전후): 자연 산수의 고요한 선적(禪的) 경지를 오언절구·율시로 빚어낸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고체시와 악부·절구에서 자유분방한 낭만적 기상을 펼친 이백(李白, 대표작 「월하독작(月下獨酌)」), 그리고 안사의 난이라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 민생의 고통을 기록하며 칠언율시를 포함한 근체시의 예술적 완성을 이룬 두보(杜甫, 대표작 「춘망(春望)」·「등고(登高)」)가 나란히 섰다 [S04, S06, S110, S111, S112, S113].
  3. 중당(8세기 후반~9세기 전반): 성당의 정점을 통과한 시인들이 각기 새로운 길을 모색한 시기다.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원진(元稹)은 평이하고 통속적인 시어와 사회 비판을 담은 신악부(新樂府, 예: 백거이의 「매탄옹(賣炭翁)」) 운동을 이끌었고, 반대로 한유(韓愈)와 맹교(孟郊), 이하(李賀)는 기괴하고 낯선 이미지와 산문적 구법을 시에 끌어들여 독창적인 미학을 개척했다 [S07, S14, S66, S67, S68, S69].
  4. 만당(9세기 중엽~10세기 초): 쇠락해 가는 제국의 정조 속에서 두목(杜牧)은 청아하고 날카로운 영사시(詠史詩, 역사를 소재로 한 시, 예: 「적벽(赤壁)」)로 이름을 날렸고, 이상은(李商隱)은 정교한 전고(典故)와 중의적 상징으로 내밀한 애상과 시대적 고독을 노래했다 [S70, S71].

송대(宋代, 960–1279)의 시풍 혁신과 강서시파

송나라에 들어서면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신흥 양식인 사(詞)가 크게 유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詩)가 쇠퇴하거나 사에 자리를 내준 것은 결코 아니다 [S07, S14]. 오히려 송대 문인들은 인쇄술의 발달과 과거제의 확대 속에서 당대보다 훨씬 방대한 양의 한시를 남겼으며, 당시(唐詩)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송시(宋詩)’만의 미학을 세웠다 [S07, S14, S49].

당시가 풍부한 정감(情)과 선명한 형상, 함축적인 성률(음절·기상)에 강점이 있었다면, 송시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국면까지 시의 소재로 넓히고 삶과 자연의 이치(理)를 성찰하는 지성적 사유와 의론(議論, 이치를 따져 논함)을 시 안으로 끌어들였다 [S14, S49]. 북송 문단을 이끈 구양수(歐陽脩)·왕안석(王安石)에 이어 등장한 소식(蘇軾, 1037–1101)은 시·사·산문에서 모두 자유자재한 경지를 보여 준 대가다 [S72]. 그는 봄밤의 정취를 읊은 칠언절구 「춘소(春宵)」처럼 유려한 서정시는 물론, 여산(廬山) 서림사 벽에 적은 칠언절구 「제서림벽(題西林壁)」처럼 자연 경관에서 삶의 철학적 통찰을 길어 올리는 시를 남겼다 [S72, S122].

不識廬山真面目,只緣身在此山中。 — 蘇軾, 「題西林壁」 [S122]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내 몸이 이 산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이라네.” [S122] 보는 위치에 따라 가로로 뻗은 능선이 되기도 하고 뾰족한 봉우리가 되기도 하는 산의 모습을 그린 앞 두 구에 이어, 대상 속에 매몰되면 오히려 전체 진실을 보지 못한다는 인식을 스물여덟 자 절구로 응결한 송시 특유의 명구다 [S72, S122].

소식의 문하에서 나온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두보의 시법과 한유의 문법을 깊이 연구하여, 옛사람의 시어와 전고를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탈태환골(奪胎換骨)’과 ‘점철성금(點鐵成金, 무쇠에 점을 찍어 황금으로 바꿈)’, 그리고 평범한 운자나 평측을 의도적으로 비껴가는 기법으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종조가 되었다 [S14, S73]. 강서시파의 치밀한 작시법은 남송과 고려·조선 문단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나, 후류들이 지나치게 책 속의 전고와 거친 기교에만 매달리자 남송 후기 엄우(嚴羽)가 『창랑시화』에서 송대의 이른바 ‘문자선(文字禪)·의론시’를 비판하고 성당 시풍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S14, S73].

남송(南宋) 시단에서는 강서시파의 수련을 거치면서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낸 시인들이 활약했다. 육유(陸游, 1125–1210)는 금나라에 빼앗긴 중원을 회복하려는 우국충정과 강호의 삶을 웅혼한 율시와 절구로 남겼고, 양만리(楊萬里, 1127–1206)는 책 속의 전고 대신 눈앞의 자연과 아이들의 일상 풍경을 기발하고 해학적인 구어로 포착하여 ‘성재체(誠齋體)’라 불린 신선한 시풍을 열었다(예: 「야국(野菊)」) [S74, S75].


금·원·명·청: 비평의 심화와 시론의 갈래

금(金, 1115–1234)과 원(元, 1271–1368)의 시단

남송과 대치하며 화북을 통치한 금나라와 그 뒤를 이은 원나라 시기에도 한시 전통은 끊기지 않고 북방의 풍토 및 다민족 문화와 만나 새로운 결을 더했다 [S07, S76, S81]. 금대 문학을 대표하는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금나라가 멸망한 뒤 사라져 가는 금대 시인들의 작품을 널리 모아 인물 약전과 함께 엮은 『중주집(中州集)』을 남겨 시로써 한 시대의 역사를 보존(以詩存史)했다 [S76]. 또한 그가 한·위부터 당·송에 이르는 시인들을 서른 수의 칠언절구로 비평한 「논시삼십수(論詩三十首)」는 시의 형식으로 시론을 펼친 ‘논시절구(論詩絶句)’ 전통의 전범이 되었다 [S76, S123].

원대에는 도시 연희와 결합한 원곡(元曲, 잡극과 산곡)이 크게 융성했으나, 문인 사회에서는 시와 사의 창작도 활발히 이어졌다 [S07, S81]. 서역 출신 문인으로 유려하고도 호방한 시풍을 보여 준 살도랄(薩都剌), 원말 강남 시단에서 기이하고 화려한 의고 악부인 ‘철애체(鐵崖體)’를 이끈 양유정(楊維楨), 그리고 벼슬을 마다하고 묵매(墨梅) 그림과 고결한 매화시·은일시를 남긴 왕면(王冕, 대표작 오언율시 「춘한(春寒)」) 등이 원대 한시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S79, S80, S81].

명대(明代, 1368–1644)의 복고론과 성령론 논쟁

명나라 초에는 고전 시가의 여러 체제를 두루 소화하며 강남 문단을 이끈 고계(高啟, 1336–1374 [FC09], 대표작 「동방곡(洞房曲)」)가 활약했으나, 명대 중엽 이후 시단은 ‘당시(唐詩)와 송시(宋詩) 가운데 무엇을 법도로 삼을 것인가’, 나아가 ‘고전의 법격(法格)을 따를 것인가, 개인의 진솔한 마음을 따를 것인가’를 둘러싼 거대한 시론 논쟁의 장이 되었다 [S49, S82, S83, S84].

먼저 명 중기에는 이몽양(李夢陽, 1473–1530 [FC10])·하경명(何景明) 등 전칠자(前七子)와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 등 후칠자(後七子)가 문단을 주도하며 강력한 복고론(復古論)을 내걸었다 [S49, S83]. 이들은 송대 이후의 시가 이치 따지기에 빠져 시적 기상을 잃었다고 비판하며, “문장은 반드시 진·한(秦漢)을 본받고 시는 반드시 성당(盛唐)을 본받아야 한다”는 구호 아래 고시에서는 한·위를, 근체시에서는 성당의 격조와 음율을 모범으로 삼았다 [S49, S83].

그러나 복고파의 말류가 성당 시의 어휘와 구절을 겉모습만 흉내 내는 의고주의에 빠지자, 명나라 말기 만력 연간에 원종도·원굉도(袁宏道, 1568–1610)·원중도 삼형제를 중심으로 한 공안파(公安派)가 일어나 성령론(性靈論)으로 맞섰다 [S49, S84]. 원굉도는 시대마다 문학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므로 옛사람의 시구를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시인 각자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성령(性靈, 꾸밈없는 개성과 감정)을 독창적인 언어로 쏟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S49, S84]. 명대의 이 복고와 성령의 대립은 단지 중국 문단에 그치지 않고 조선 중·후기 문단(삼당시인과 천기·성령론 등)에도 깊은 파장을 미쳤다 [S04, S49, S50].

청대(淸代, 1644–1911)의 시론 갈래와 시율 과거의 재도입

중국 고전시의 마지막 왕조인 청대에는 앞선 당·송·원·명의 유산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대규모 시집 편찬(『전당시(全唐詩)』·『명시종(明詩綜)』 등)과 함께, 근체시의 미학적 기준을 둘러싼 정교한 시론들이 각축을 벌였다 [S49, S50, S85, S86].

  1. 신운설(神韻說): 청초 시단을 이끈 왕사정(王士禛, 1634–1711, 호 어양산인)이 제창한 이론으로, 왕유·맹호연과 사공도·엄우의 전통을 이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경물 너머에 아스라이 감도는 청아한 여운과 기품(신운·神韻)을 시의 최고 경지로 삼았다 [S49, S85].
  2. 격조설(格調說): 성당 시의 웅장한 격조와 『시경』 이래의 온유돈후(溫柔敦厚, 온화하고 두터운 시교)한 도덕적 품격을 강조한 심덕잠(沈德潛, 1673–1769)의 이론으로, 『당시별재집(唐詩別裁集)』 등을 편찬하며 정통 시풍을 제시했다 [S49, S86].
  3. 성령설(性靈說): 명말 공안파의 정신을 이어받아 18세기 중엽 원매(袁枚, 1716–1797, 일부 서력 환산 자료에서는 1798년 1월 3일 사망으로 표기; 대표작 「행역잡영(行役雜詠)」)가 『수원시화(隨園詩話)』를 통해 널리 펼친 시론이다. 원매는 옛 격식이나 도학적 교훈에 얽매이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의 살아 있는 성정과 영감을 솔직하고도 재치 있게 읊는 것이 참된 시라고 보았으며, 이 흐름은 18~19세기 조선과 일본의 한시권에도 활발히 수용되었다 [S50, S51, S99].

한편 제도사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송대 왕안석의 과거 개혁 이후 과거 시험에서 경전의 뜻을 묻는 경의(經義, 경전의 뜻을 논하는 글)가 중심이 되면서 시부 시험이 한동안 제외되거나 부침을 겪었으나, 청 건륭(乾隆) 22년(1757)에 조정에서 과거 시험에 시율(詩律, 정해진 제목과 운자로 짓는 오언팔운의 시첩시·試帖詩)을 정식 과목으로 다시 도입했다 [S09]. 시율 과거의 재도입으로 평수운과 근체시 평측·대우 규범은 청대 문인 관료 사회 전체가 반드시 익혀야 할 실무적이자 문학적인 표준으로 다시금 확고히 자리 잡았다 [S09].

시대 구분주요 시형과 새로운 흐름제도·문헌·비평의 주요 사건대표 시인 및 작품군
선진(先秦)『시경』 사언시(풍·아·송), 『초사』 장단구 서정시의례악·외교 인용과 남방 무속·서정 전통의 형성『시경』 「관저」, 굴원 「이소」·「구가」, 송옥 「구변」
한·위(漢魏)악부 가요와 문인 악부, 오언고시·초기 칠언시 성립한 무제 악부 관서 설치, 「모시서」 경학 해석, 건안 시단『고시십구수』, 조조 「단가행」, 조비 「연가행」, 조식 「공연시」
위진남북조전원시·산수시·칠언 악부 발달, 영명체 성조 실험유협 『문심조룡』, 종영 『시품』, 심약 「사령운전론」도연명 「귀원전거」·「음주」, 사령운, 포조, 심약
당(唐)오언·칠언 절구·율시·배율(근체시) 완성, 신악부 운동진사과 시부 시험 정착, 『절운』·『당운』 운서 보급왕유, 이백 「월하독작」, 두보 「춘망」·「등고」, 백거이, 한유, 두목, 이상은
송(宋)송시(사유·일상·의론)의 만개, 사(詞)와의 공존인쇄술과 과거 확대, 강서시파 형성, 엄우 『창랑시화』소식 「춘소」·「제서림벽」, 황정견, 육유, 양만리 「야국」
금·원(金元)북방 한시 전통 계승, 원곡(산곡·잡극)과 한시의 병존원호문 『중주집』 편찬 및 「논시삼십수」 비평원호문, 조병문, 왕약허, 살도랄, 양유정, 왕면 「춘한」
명·청(明淸)고전 시체 전반의 계승·총집 편찬, 시첩시 수련전후칠자 복고론과 공안파 성령론, 청대 신운·격조·성령설, 1757년 시율 과거 재도입고계 「동방곡」, 이몽양, 원굉도, 왕사정, 심덕잠, 원매 「행역잡영」

이처럼 중국 한시의 역사는 어느 한 시대의 정형이 앞 시대의 형식을 지워 버린 교체의 역사가 아니라, 사언·초사·악부·고시·근체시·사·곡이 겹겹이 쌓이며 서로를 비추어 온 축적의 역사다 [S07, S14]. 다음 장인 시대별 시인에서는 이 거대한 흐름을 몸소 일구어 낸 대표 시인들의 생애와 시풍을 한 사람씩 만나고, 한국의 한시에서는 이 시형과 시론들이 한국 역사와 만나 어떻게 독자적인 문학사를 이루었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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